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28 학생민주의거 (문단 편집) == 상세 ==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이었던 그날 수성천변에선 야당인 [[민주당(1955년)|민주당]]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참고로 당시 장면 후보는 같은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사망하면서 거의 대통령 후보급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심지어 대구 지역은 당시 [[이승만]]/[[자유당]]에 대한 반감이 매우 짙었다.[* [[장면]]은 [[제3대 대통령 선거|1956년 부통령 선거]] 당시 대구에서 무려 8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런 대구의 민심이 바뀌는 건 제3공화국이 들어서는 1960년대 이후부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제5대 대통령 선거|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측이 [[남조선로동당]] 출신이었던 박정희 후보에게 [[종북몰이]]를 감행했고 이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반발심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1980년대 중반까지 총선에서는 [[신민당(1967년)|신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등 이런 성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낸 [[제13대 대통령 선거|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부터는 이런 성향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대구 지역은 보수적 색채가 강한 곳이지만 당시 대구는 남한에서 가장 진보적인 동네로 꼽혔다.[* 해방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의 입김이 강했다.] 이에 대구 지역 학생들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몰려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우려한 당시 [[자유당]]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대구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닛세이가쿠엔|일요 등교]]'''를 지시했는데 당국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했다. 당시 일부 학교는 갑자기 임시시험을 친다고 했고[* 3월 3일로 예정된 시험을 변경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는 3월이 아닌 4월에 새 학년을 시작했다. 현재의 3월 학기제로 변경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일부는 단체 영화관람이나 토끼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등교를 종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유당의 꼼수를 학생들이 간파했다는 점이었다.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370|#]][* 보면 알겠지만 이 시위가 일어난 배경엔 당시 자유당의 멍청함도 한몫했다. 애초 일요일 등교 근거가 이해가 안 되는 구실이었던 데다 일요 등교라는 학생들에게 감정적으로 매우 기름 붓기 좋은 행위를 강행함으로서 일부 학생들의 시위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을 문제를 대규모 학생들의 반발로 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는 주5일제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요일에 등교를 하면 2월 22일부터 [[3·1절]] 전날인 29일까지 무려 8일 연속 등교를 하게 되는 학생 입장에선 그야말로 열불 터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억지로 학생들이 모이니 당연히 학생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갔고 이러한 행태가 자유당의 독재정권 유지에 의해 일어난 일이란 걸 확인하고 단체로 모여 시위한 것이다. 즉, 당국이 의도치 않게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지도록 유도한 꼴이다.] 우선 이에 반발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의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도 27일 시위를 벌였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1942)|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모인 경북고,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후술되어 있는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그리고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를 일으키며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갔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이 [[대구MBC]]의 달빛소화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교사들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일부는 학생들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 [[중앙대로(대구)|중앙로]]를 거쳐 [[경상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당시 기준. 1966년 [[북구(대구광역시)|북구]] [[산격동]]을 거쳐 2016년에 [[안동시]]로 이전하였다.]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행동에 당시 [[오림근]] 경상북도지사와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며 [[종북몰이]]를 시전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오히려 구타당하던 학생들을 보고 경찰에게 달려들어 뜯어말리고 박수 치는 등 격려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위엔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그 중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중엔 학생들을 도와주던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 결국 처벌을 완화해야 했고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생은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후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